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소카와 모리히로 (문단 편집) == 정치 활동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IKi4XP2xZiY)]}}}|| ---- [[1938년]] [[1월 14일]], 도쿄부 도쿄시(현 [[도쿄도]] [[치요다구]])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본적지는 [[구마모토현]]이었다. 1963년 4월 [[아사히 신문]]에 입사해 5년간의 짧은 정치 [[기자]] 생활을 마치고 68년 퇴사했다. 퇴사 직전 소위 [[김희로]] 사건(金嬉老事件)[* 김희로 사건: 폭력단원 김희로(나중에 권희로로 개명, 1928~2010)가 빚을 받으러 갔다가 인질극을 벌이면서 경찰과 대치하게 되는데 경찰이 [[인종 차별]] 발언을 했다며 수차례 기자들에게 자기 입장을 피력하는 등 사건을 벌였다.]을 심층 취재하면서 [[재일 한국인]]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는다. 1969년 그는 처음엔 [[일본사회당(1945년)|일본사회당]] 소속이던 구마모토 1구[* 중선거구제 시행 당시의 선거구이다.] 중의원 의원 마츠마에 시게요시를 통해 정계 진출을 모색했다. 당시 일본은 보수의 자민당과 혁신의 일본사회당이란 양강 구도로 정치를 꾸려갔었다. 그러나 결국은 무소속으로 자기 본적지인 (구) 구마모토 1구에 출마했다. 이유는 자신이 일본사회당보단 보수 쪽에 가깝다고 생각해서였단다. 같은 지역구에 사카모토 타이라, 후지사키 히사오라고 일본사회당도 후보를 2명이나 냈다. 안 그래도 일본사회당이 강한데 표까지 갈라먹은 셈. 당연 낙선. 출마 당시 그의 아버지 모리사다는 '정치라니 그딴 [[야쿠자]]들이 하는 짓을 니가 하려느냐'며 말렸다고. 후일 그의 친동생 고노에 다다테루(近衛忠煇)[* 현 고노에가 당주. 원래 본명은 호소카와 모리테루(細川護輝)이다. 참고로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친동생인데도 성이 다른 이유는 패전 이후 외가 [[고노에]] 가문의 직계가 사실상 단절되어버리게 되자 타다테루가 사후입양으로 고노에 가에 들어오게 되었기 때문이다.]는 그 일로 [[문예춘추]] 인터뷰에서 독자들을 웃겼다고. "아니, 우리 집안 장손이면 뭘해요, [[고노에 야스코|공주]]랑 결혼한 저보다도 인지도가 없었는데." 유머 감각은 집안 내력인 모양. 그래서인지 낙선이야 했지만 그가 집집마다 방문한 동네는 이상하게 득표를 많이 했다고. 결국은 1971년 자민당에 입당해 참의원 선거에 나선다. 극우 작가 겸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의 지원 유세를 받는 등, 역시 너도 별 수 없구나 소리를 들었지만 자민당 내 중도 좌파였던 [[다나카 가쿠에이]][* 사실 자민당내에서 진짜 좌파는 [[번촌정책연구소]]를 이끌던 [[미키 다케오]]였고 다나카는 [[요시다 시게루]]-[[이케다 하야토]]-[[사토 에이사쿠]]로 이어지는 보수본류라인이었으며 다나카 본인 스스로도 보수본류의식이 매우 강하였다.]의 계파로 들어간다. 소위 칠일회 혹은 목요 클럽이라 불렸던 모임을 통해 중의원만 40명인 자민당내 대형 파벌을 형성하면서, 좌장인 다나카 가쿠에이가 1972년 총리에 당선되는 기염을 토한다. 일본 참의원은 6년 임기로, 전반 3년, 후반 3년 임기를 보장받는데, 다나카 총리의 계파였던 그도 후반에는 대장성 정무 차관, 자민당부간사장 등 요직을 맡게 된다. 후반 임기 중 구마모토 현 지사 출마를 표명하고 선거 준비에 들어간다. 83년 구마모토 현 지사에 당선된 그는 소위 '니뽄이치즈쿠리운동(日本一づくり運動)'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지방 자치 운동을 벌였다. 각 지방마다 특산품을 하나씩 만들어 경제도 살리고 지방 분권의 초석을 만들자는 운동이었다. 구마모토 현을 예술향으로 만들기 위해 대형 현립극장을 만드는 등 노력했다. 재선까지는 지사로서 열심히 노력했고 인기도 많았다. 3선은 따놓은 당상이었지만 갑자기 '권불십년'을 외치고는 출마를 단념한다. 1991년 퇴임한 그는 도쿄로 이주했다. 그리고는 [[문예춘추]]를 통해 '일본자유사회연합(自由社会連合)'을 제창하기 시작했다. 그는 냉전구도 속에서 리베이트 사건 등 일본이 부패로 썩어간다고 주장하면서, 대 정치, 행정 개혁을 통해 일본을 변혁하자고 주장했다. 아울러 보수 자민당, 진보 사회당 구도의 양당 구도를 반드시 박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자민당을 탈당했다. 1992년 [[일본신당]]을 결성한 그는 당대표에 올랐고 참의원에 재선됐다. 이듬해인 1993년 8월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에 실패하자 야7당 연립정권을 만들어 자민당을 뒤엎고 총리가 됐다. 38년 만의 비(非) [[자유민주당(일본)|자민당]] 총리로 [[호소카와 내각]] 출범 최초엔 지지율이 74%에 달했다.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도 "태평양 전쟁은 침략 전쟁이며, 잘못된 전쟁이었다"라든가, 한국 [[경주시]]를 방문하여 "참기 힘든 고통을 끼쳤다. 우리의 행위를 깊이 반성하며 마음으로부터 사과드린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94년 5월에는 니시신주쿠 게이오플라자호텔에서 암살미수 사건을 겪었다. 범인은 송혼숙(松魂熟)이라는 일본 우익단체의 회원인 52살의 노조에 마사카츠. 흉기는 38구경 리볼버 권총이었으며, "호소카와 전 총리가 국회에서 태평양전쟁은 침략행위라고 한 발언과, 예산안 통과 전 사퇴한 것에 불만을 품어 일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여러모로 일본 극우의 수준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년을 넘기지 못하고 1994년 4월 28일 정치자금 문제([[사가와 규빈 사건|사가와 규빈]]이라는 기업으로부터 1억 엔을 빌렸다)로 돌연 사퇴했다. 하지만 이미 연립정권의 붕괴는 1월부터 그가 염원하던 정치개혁 법안이 사회당의 비토로 저지되면서 시작되었다는 분석이 많다. 또한, 기존의 소비세를 국민복지세로 바꿔 그 비율을 3%에서 7%로 올리는 구상도 강력한 반발로 무산되어 정권의 구심력을 잃고 말았다. 후임인 [[하타 쓰토무]] 총리는 두 달 만에 사임하며 반자민당 연립은 1년도 못 가 붕괴되고 만다. "잎이 흩어짐은 때를 아는 것, 이 세상 꽃은 꽃대로 사람도 사람대로"라며 1998년 환갑과 함께 중의원을 사퇴했다. 이 말은 먼 선조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정실인 [[가라샤]]의 [[사세구]]를 인용한 말이다. 가라샤의 원 사세구는 "질 때를 알았을 때야 비로소 세상의 꽃도 꽃이요, 사람도 사람이리라(散りぬべき 時知りてこそ 世の中の 花も花なれ 人も人なれ)." [[1998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